리햐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생애와 작품 개론


이 경선(Kyung-Sun Lee)
 
2002-04-01


Table of Contents

1.  서문
2.  바이에른 주
3.  슈트라우스의 탄생과 성장
4.  첫번째 시도
5.  마이닝엔, 뮌헨, 바이마르 그리고 교향시 작곡
6.  다시 고향으로
7.  베를린 그리고 오페라 작곡
8.  오페라 "잘로메"
9.  인간 슈트라우스
10.  각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
11.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12.  오페라 "카프리치오" 그리고 해피 엔드
13.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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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

독일의 작곡가요 지휘자였던 리햐르트 슈트라우스 (1864-1949)는 가난하고 생전에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수 많은 음악가상과는 거리가 멀다. 행운아로 태어나서 부모와 친척 그리고 여러 단체의 원조와 보조를 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뿐더러 작곡가로 또한 지휘자로 초반기부터 성공과 인기를 누렸다.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작곡가도 아니었으니 동화의 왕 루드비히 제 2세 (Ludwig II. 1845-1886)가 즉위한 해에 태어난 그는 나치 독일을 거쳐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생을 마감하면서 거의 70년 동안이나 창작 활동을 했다. 이 기간에 독일의 사회와 정치 체제가 여러 번 바뀌었듯이 음악사에도 커다란 변천이 있었다. 그러니까 슈트라우스가 청년기인 1880년대에 바그너 (Richard Wagner)는 30년이 넘도록 몰두하여 그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 (Parsifal)"의 작사 작곡을 마쳤고 일반적으로 그의 적수로 간주되는 브람스 (Johannes Brahms)는 제 3, 제 4 교향곡을 완성하였는가 하면, 1909년엔 이미 무조인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의 "세 개의 피아노 곡 (Drei Klavierstuecke op. 11)"이 나왔다. 슈트라우스는 초기에 아주 진보적인 작품을 내놓는 작곡가로 알려졌는데 오페라 "잘로메 (Salome 1905)"와 "엘렉트라 (Elektra 1908)"를 정점으로 하여 조성 음악을 떠나지는 않았다. 한 작곡가로서 취한 이런 시종 일관한 태도는 후대에 "낙후한 작곡가" 또는 "바그너-브룩크너 (Anton Bruckner)전통의 계승자"로만 해석되었다. 12음 기법을 사용한 제 2의 빈 (Wien) 학파를 지나 전쟁 후 다름쉬타트 (Darmstadt) 학파의 등장으로 슈트라우스 음악은 80년대까지도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10년대 불협화음의 긴장상태를 해소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협화음과 동렬에 놓아 작곡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면 70년대부터는 거꾸로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60년대의 전위를 이끌어 가던 펜데레츠키 (Krzysztof Penderecki)같은 작곡가들이 조성을 새롭게 발견하여 그들 작품에 융합시킴으로써 슈트라우스나 그의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또한 조성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많은 작품이 새로 발견되면서 제 2의 빈 학파가 1945년까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모든 작곡가에게 끼친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슈트라우스가 죽은지 50년이 지난 지금 (1999) 다행스럽게도 전위니 전통이니 하는 범주를 떠나, 다원론적으로 각 작곡가의 음악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격동의 유럽 역사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이 음악가의 일생은 오늘도 그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큰 호기심과 흥미를 불어 일으킨다 하겠다.

푄바람이 불던 어느 날 독일 남부 바이에른 (Bayern) 주의 수도 뮌헨 (Muenchen) 근교에서 본 풍경은 퍽 인상적이었다. 평상시 멀리 어슴프레 보이던 눈에 뒤덮인 산들이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우뚝 내 앞에 다가서서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현듯이 뮌헨 태생인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여러 교향시와 오페라 음악의 전형적인 무지개빛 음색이 떠올랐다. 그만의 특유한 화성 변화외에 취주악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얻은 찬란한 음향말이다. 여기에 "자부심이 듬뿍한" 선율의 흐름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알프스 산맥이 머지 않아 들어서는 이곳에서 태어난 그의 음악 언어가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다른 음악가와는 달리 슈트라우스는 음악이외 여러 방면에 관심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등 시각적인 것과 문학 그리고 철학까지 그의 작품 속에 수긍이 가도록 융합시킨 작곡가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슈트라우스가 탄생하고 성장한 뮌헨은 (34살까지 살았음)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바탕을 제공한다고 하겠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라도 이런 지역적인 전제 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운 법이다.

2.  바이에른 주

지금과는 달리 19세기 바이에른 주는 북부 독일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뒤져 있었다. 그렇지만 슈트라우스가 탄생할 즈음 뮌헨은 독일에서 베를린 (Berlin)과 함부르크 (Hamburg) 다음가는 대도시로 발달해 있었을 뿐더러 "이자르 (Isar)강가의 아테네 (Athen)"라는 별명이 붙은 예술의 도시로 관광객이 오고 갈 정도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 경탄자이자 수집가인 루드비히 제 1세 (Ludwig I. 1786-1868)의 업적이었는데 그는 인간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봄으로 순화되고 향상될 수 있다는 독특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문화재를 개인적인 향유나 세력의 과시물로만 취급하던 바로크 (Barock) 시대의 군주와는 달리 박물관을 지어 진열하고 ! 일반인에게 공개하였으니 조각박물관 (Glyptothek) 구, 신 미술관 (Alte, Neue Pinakothek)이 그것이다. 1825년부터 1848년까지 통치한 그는 또한 아무도 뮌헨을 보지 않고서는 독일을 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뮌헨을 미화하려는 포부를 가졌다. 이것은 곧 도시 계획으로 구체화되어 그는 "오데온 광장 (Odeonsplatz)", "프로퓔렌 (Propylaeen)"이 서 있는 "국왕의 광장 (Koenigsplatz)"을 건설하고 (이로부터 이자르 강가의 아테네라는 명칭이 유래함) "장군관 (Feldherrnhalle)"과 "개선문 (Siegestor)"을 세웠다. 그리고 "오데온 광장"에서 시작하여 "개선문 "까지 이르는 "루드비히 거리"를 닦고 이 거리에 루드비히 교회, 뮌헨 대학, 바이에른 국립 도서관이 들어서도록 하였다. 이런 외양적인 변화와는 상관없이 뮌헨사람들은 1810년 이후 지금도 거행되는 - 16일 동안 진행되어 10월 첫번째 일요일에 끝나는 - "10월 축제"를 즐겼으니 당시의 뮌헨은 바이에른 지방색과 도시적인것이 독특하게 어울어진 곳이었다. 1840년 뮌헨에 들린 동화작가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스 미술과 서민적인 맥주 (예로부터 보리 쥬스 또는 흐르는 빵 라고도 일컬어지는 독일의 민중 음료)가 공존하는 모순의 도시였다. 이런 뮌헨의 특수성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하겠는데 오늘날 영화산업과 출판, 지멘스 (Simens)와 베엠베 (BMW)의 도시며 또한 독일 컴퓨터 산업의 한 중심지이지만 해발 520m 에 위치한 덕택으로 독일에서는 흔치 않은 강한 햇볕을 받아 여름이면 무섭도록 빨리 자라나는 진녹색 잔디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 자연의 힘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건조한 공기와 푸른 하늘은 또한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  슈트라우스의 탄생과 성장

우연일까 슈트라우스는 두 사람 다 같은 바이에른 주 출신이나 대조적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요제파 (Josepha, 집에서는 요제피네라고 불렀음)는 뮌헨의 부유한 맥주 양조업자 게오르크 프쇼르 (Georg Pschorr)의 딸로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부드러우며 교양과 애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호른주자인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 (Franz Strauss)는 파르크쉬타인 (Parkstein)에서 말하자면 사생아로 태어나 종루지기며 시골 악사인 삼촌집에서 자랐다. 음식점에서 무도곡을 연주해야 하는 등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격렬하고 잘 노하며 엄격한 성격이었다고 후에 리햐르트 슈트라우스는 회고했다. 16세 연하인 요제피제는 그의 두번째 아내인데 콜레라로 1854년 며칠 사이 첫 부인과 두 아이를 몽땅 잃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혼한 이듬 해인 1864년 42세가 되어 아들 리햐르트를 보았고 삼년 뒤에 딸 요한나 (Johanna)를 얻었다. 험한 성장 과정을 거친 후 오로지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뮌헨 궁정교향악단의 수석 호른주자가 되고 또한 음악원 교수로 입신 출세한 그는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견실한 교육이라고 간주하고 자식 교육에 엄정을 다하였다. 훗날에 그의 증손자는 이런 교육을 받은 까닭에 작곡가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오고 간 많은 편지가 꼼꼼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여섯 살이 되어 슈트라우스는 성당 부속 학교에 입학했다. 즐겨 배울 뿐만 아니라 활발하여 친구도 많았다. 열 살이 되어 왕립 루드비히 귐나지움 (Gymnasium 우리 나라 중고등학교에 해당함) 학생이 되었는데 수학을 제외한 모든 학과에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특히 역사와 고전어 그러니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즐겨 배웠으니 차후 오페라 작곡가로서 소재 선택의 방향과 경향을 이미 뚜렷이 보였다 하겠다 ("엘렉트라", "낙쏘스 섬의 아리아드네", "이집트의 헬레나", "다프네", "다나에의 사랑"). 음악 분야라면 물론 그와 견줄 학생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였다.

음악 수업은 네살 반 때 피아노 교습으로 시작되었다. 교사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궁정교향악단의 하프연주가이기도 한 아우구스트 톰보 (August Tombo)였다. 이 조기 음악 교육은 사실 아버지가 아들의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분별해서 의식적으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다. 만성질환으로 자주 요양을 해야 하는데 음악가의 박봉으로 요양비 조달이 어려운 톰보를 돕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란츠 슈트라우스 자신은 소질은 있으나 빈한한 여러 음악가를 무료로 가르쳐 주곤 하였다. 일년 반 후에 친척이자 역시 아버지의 동료인 벤노 발터 (Benno Walter)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누이 동생의 말에 의하면 리햐르트는 바이올린 켜는 것 자체에 그렇게 큰 흥미를 갖지 못하여 길어야 반시간 동안 연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관찰에 따르면 어릴 적에 슈트라우스는 호른소리를 들으면 미소로 답하는 반면 바이올린소리가 나면 막 울었다고 한다. (호른은 실제로 작곡가 슈트라우스가 제일 좋아하는 악기가 되었다.) 그래도 13살의 리햐르트는 크로이쩌 (Conrad Kreutzer)의 연습곡이나 비옷티 (Giovanni Battista Viotti)의 이중주곡을 켤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 연주에는 큰 진전을 보여 11살 때 당시 유명한 피아노 교육가인 프리드리히 니스트(Friedrich Niest)에게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13살이 되면서 때는 필드 (John Field)의 야상곡이나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Bartholdy)의 라- 단조 협주곡 그리고 바흐 (Johan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등을 연주할 수 있었다. 훗날 리햐르트 슈트라우스는 자기가 그리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왜냐하면 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수 불가결한데 거기에 점점 관심을 잃어갔던 것이다. 그 대신 초견 연주는 즐겨 하였는데 가능한한 많은 곡을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와 지휘자가 될 사람의 조건을 이 때 이미 채우고 있었다고나 할까? 작곡 수업은 귐나지움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1875년) 시작되어 궁정 악장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 (Friedrich Wilhelm Meyer)에게 화성학, 대위법, 형식론 그리고 관현악법을 배웠다.

친가쪽으로 여러 명의 직업음악가를 두었고 외가쪽으로 음악애호가의 집안을 둔 슈트라우스에게 음악은 극히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음악회와 오페라 감상 - 슈트라우스의 첫번째 오페라는 어머니와 함께 1871년 일곱 살 때 뮌헨의 궁정 극장에서 보고 들은 베버 (Carl Maria von Weber)의 "마탄의 사수"였다. - 의 기회를 가졌을 뿐더러 친척과 친구가 모이면 함께 실내악 연주을 하여 가정에서도 음악이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때면 슈트라우스는 현악사중주에 직접 참여하거나 삼중주 그리고 가곡 반주를 하여 많은 고전 음악에 친숙해 질 수 있었다. 그는 집에서 아버지를 위해 수도 없이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의 호른 협주곡이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의 호른 소나타를 반주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은 연주가 되는지 배웠다고 하였다.

19세기 독일 음악사에 있어 벌어진 토론은 유명하다. 리스트 (Franz Liszt)와 바그너를 중심으로 한 소위 신독일 학파라는 것이 생겨나 많은 음악가들이 신조와 기호에 따라 패를 지어 시비를 논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그에게 음악이라면 특히 모차르트, 그리고 하이든 (Joseph Haydn)과 베토벤의 음악을 뜻했다고 한다. 그 뒤에 슈베르트 (Franz Schubert), 베버,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Bartholdy), 슈포어 (Ludwig Spohr) 음악이 따를 정도였다. 슈트라우스는 16살까지 이런 아버지의 엄격한 비호아래 고전 음악속에서만 자랐다고 했다. 그는 바그너 혐오자인 아버지가 가극 "탄호이저 (Tannhaeuser)"는 그런대로 인정했지만 "로엔그린 (Lohengrin)"은 너무 감상적이라고 여겼고 그 후에 나온 바그너 작품은 완전히 거부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1864년 루드비히 제 2세가 바그너를 뮌헨으로 불러 들인 후, 심지어 몇몇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uernberg", "라인골트 Das Rheingold", "발큐레 Die Walkuere")의 초연 때 직접 참여해야 했다. 그것 뿐인가 "트리스탄" 연습시엔 인간적으로도 별 호감을 갖을 수 없었던 바그너를 거의 매일 보아야만 했다고 한다.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이 시절 뮌헨에서 이 오페라를 지휘했던 한스 폰 뷜로 (Hans von Buelow)가 당시의 명 바이올린주자인 요제프 요아힘 (Joseph Joachim)에 비유하여 "호른의 요아힘"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호른연주가였다. 그는 오페라나 음악회에서 호른 연주하는 것을 엄숙한 행위라고 여겨 베토벤 교향곡이나 "마탄의 사수", "오베론 (Oberon)", "한 여름 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에 나오는 어려운 독주 부분은 몇 주 전부터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특히 "영웅" 교향곡 제 1 악장의 바-장조 부분이나 교향곡 9 번 아다지오 악장의 내림 사-장조 부분은 당시 뮌헨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아들 슈트라우스는 회상하였다. (그는 또한 바이올린연주에도 능하여 폐가 약해서 호른 불기가 어려워졌을 때 현악사중주단에서 몇 년 동안 비올라를 켜기도 하였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연습시 호른 성부를 클라리넷에나 적합한 성부라고 공언을 하면서도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심금을 울려 바그너도 "이 슈트라우스는 견디기 어려운 녀석이긴 하지만 호른 불 때면 화를 내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882년 바이로이트 축제관 (Bayreuther Festspielhaus)에서 "파르지팔 (Parsifal)" 초연 때 호른주자로 초빙되기도 하였는데 말하자면 절조있는 인간으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끝끝내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반면 이 공연 때 바이로이트까지 아버지를 동반했던 아들 슈트라우스는 "트리스탄"과 "니벨룽엔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어버렸다. 1889년 축제 공연 때 그는 드디어 조수로 협력할 수 있었고 1894년엔 그의 간절한 희망 사항이 성취되어 처음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봉을 잡아보게 되었다.

4.  첫번째 시도

슈트라우스가 처음으로 작곡한 것은 "크리스마스 축가"로 1870년 여섯 살 때 일이다. 악보는 그가 그렸지만 아직 글씨를 작게 쓸 수 없어서 가사는 그의 어머니가 대신 써 넣었다고 한다. 그 뒤 "쉬나이더 폴카 (Schneider Polka)", 피아노 소나타, 가곡, 호른과 클라리넷을 위한 곡, 합창곡을 썼으며 마이어에게 관현악법을 배운 후로는 관현악곡도 쓰기 시작했다. 이년 뒤에 슈트라우스 아버지는 피아노곡인 "쉬나이더 폴카"를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친구와 친척으로 구성된 하릅니 악단 (Harbni-Orchester)과 함께 연주하여 슈트라우스 작품 첫번째의 초연도 마련되었다. 요컨대 슈트라우스는 음악가가 될 사람으로서 이상적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으니 1875년부터 (1896년 까지) 그의 부친이 30명 가량의 취미음악가 (대부분 고급 공무원임)로 구성된 관현악단 "빌데 궁을 (Wilde Gung'l)"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주로 고전파와 낭만파 음악가의 교향곡을 연습하였는데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들 뿐만 아니라 음향기구로서 관현악단이 무엇인지 일람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또한 이 관현악단의 연주로 16세 때 자기 작품 (가봇트)을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한 신문 (Sueddeutsche Presse und Muenchner Nachrichten)에 긍정적인 평도 실렸다. 이년 후 슈트라우스는 잠시 동안 이 "빌데 궁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귐나지움 졸업 시험을 통과하여 1882년 가을 뮌헨 대학에 적을 두었다. 전공 과목은 철학, 미학 그리고 미술사였다. 그러나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대한 것은 음악이었다. 7월 아버지를 따라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파르지팔" 초연을 듣고, 자신의 내림 마-장조 세레나데 (Serenade fuer 13 Blasinstrumente in Es-Dur op.7)가 드레스덴 (Dresden)에서 그리고 라-단조 바이올린 협주곡 (Konzert fuer Violine und Orchester in d-Moll op. 8)이 빈 (Wien)에서 성공리에서 연주되면서 그는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이미 귐나지움 졸업하기 전해인 1881년 3월 작곡가로서 공식적인 데뷔를 한 셈이었다. 즉 그의 라-단조 교향곡이, 지금은 세계 대전 중 (1944)에 파괴되어 없어진 오데온 회관의 정기연주회 행사 중에 궁정악장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의 지휘로 18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연주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바그너 음악을 혐오하는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1882년 바이로이트에서 레비 지휘의 "파르지팔"초연에 협력했던 것이다.)

1883년 겨울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석달간 베를린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여기서 음악회와 오페라를 부지런히 듣고 보았으며 화가와 조각가, 작가를 사귀게 되었다. 이러던 중 그의 경력에 무엇보다도 의미 심장한 만남이 있었으니 한스 폰 뷜로와의 그것이다. 뮌헨의 궁정악단을 이끈 적이 있었고 당시 마이닝엔 (Meiningen) 궁정악단의 지휘자인 그는 친구인 출판업자 오이겐 슈핏쯔벡 (Eugen Spitzweg) - 슈핏쯔벡은 또한 슈트라우스 작품을 처음으로 출판한 발행자였다.- 으로부터 슈트라우스의 "세레나데" (op.7)를 전송 받은 후 연주 곡목에 넣고 여행 도착지마다 연주하고 있었다. 뷜로는 베를린에서 슈트라우스를 보자 마이닝엔 악단을 위해 새로 그와 같은 곡을 써달라는 주문을 했다. 다음해 여름 슈트라우스는 "13개의 취주 악기를 위한 조곡 (Suite fuer 13 Blasinstrumente in B-Dur op. 4)"을 작곡하여 뷜로에게 보냈는데 아무 대답이 없더니 겨울에 마이닝엔 악단을 이끌고 뮌헨에 연주 온 뷜로는 놀랍게도 이 작품을 - 특별히 "오전 공연"을 마련하여 - 슈트라우스에게 직접 지휘하도록 하였다. 지휘자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되어 탄생하였고 급기야 뷜로의 추천으로 1885년 10월 마이닝엔 궁중악단의 지휘 조수가 되었다. 뷜로는 재능 많은 21세 청년의 사부 역할을 떠 맡는데 그때까지 지휘자로서 별다른 경험이 없던 슈트라우스가 이 방면으로도 뛰어나다는 확신을 얻는다. 즉 슈트라우스처럼 지휘자로 태어난 사람만이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뮌헨의 오데온 회관에서 자신의 조곡 (op. 4)을 단 한번도 지휘봉을 들어 본 일이 없으면서 지휘해야 했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뷜로는 이전에 마이닝엔 관현악단과 이 곡을 연습했지만, 단원들이 이미 과로해 있다며 슈트라우스에게 사전 연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마이닝엔, 뮌헨, 바이마르 그리고 교향시 작곡

마이닝엔에서 슈트라우스는 철저하고 성실한 음악가인 뷜로에게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지휘 견습을 받았다. 그의 임용 계약은 육개월로 1886년 3월까지였는데 1885년 12월 뷜로가 러시아의 페터스부르크 (Petersburg)로 떠나 간 후로는 모든 연습을 도맡아 할 수 있게 되어 특히 산 체험을 많이 쌓았다. 다른 임무로는 여성합창단 연습과 마리 (Marie)공주에게 피아노를 교습하는 일이었다. 뷜로의 축복아래 공식적인 경력을 쌓게 된 슈트라우스는 10월 25일 역사적인 브람스 교향곡 마-단조 (4번)의 초연 (작곡가의 지휘)을 지켜 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 자신의 바-단조 교향곡 (op. 12)을 들은 브람스로부터 작곡에 관한 조언도 받았다. (이 브람스의 마-단조 교향곡 초연 후 이 곡을 상세히 연습시킨 뷜로와 마이닝엔 관현악단은 브람스와 연주 여행을 떠났다. 뷜로는 브람스와 사전 합의를 보아 한 여행 목적지인 프랑크푸르트 (Frankfurt)에서 이 교향곡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브람스가 이 도시에서도 직접 지휘를 해 버리자 뷜로는 마음에 심한 상처를 받았다. 그는 브람스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우둔한 일이었다며 사과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충돌을 동기 삼아 마이닝엔에 사직서를 내고 페터스부르크로 갔던 것이다.) 뷜로의 암시적인 영향으로 브람스에 심취한 이 시절 슈트라우스는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방랑자의 폭풍의 노래 (Wanderers Sturmlied fuer gemischten Chor und Orchester op. 14)"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익살극 (Burleske fuer Klavier und Orchester d-Moll)"을 작곡하였다. 1864년 뮌헨으로 온 후 지휘자로서 바그너 오페라의 초연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뷜로는 리스트의 제자로 그의 딸 코지마 (Cosima)와 1857년 결혼했었는데 1869년 코지마가 그와 별거하고 1870년 바그너와 결혼하자 점차 관심을 브람스 음악으로 돌린 사람이다.

슈트라우스가 마이닝엔에서 보낸 이 겨울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기간이었다. 왜냐하면 마이닝엔 궁정악단의 제 1 바이올린주자이며 작곡가이기도한 알렉산더 리터(Alexander Ritter)를 만나 작곡가로서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리터는 바그너의 조카 사위며 드레스덴 학창 시절부터 뷜로의 친구였는데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리스트와 바그너의 작품과 저서를 소개하고 예술사에 있어서 그들의 의미를 설명하여 주었다. 보수적인 가정 교육으로 그들의 음악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슈트라우스는 이 계기를 통하여 그들의 미학적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즉 소나타 형식은 베토벤에 의해 극도로 확장되어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적인 표상이 곧 외형을 형성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리스트의 근본 원리가 이 후로는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음악을 위한 작곡에 길잡이가 되었다. 자동적으로 슈트라우스는 브람스의 음악 세계로부터 소원해졌고 나중엔 아예 무관심했다. 1925년 이탈리아의 테아트로 디 토리노 (Teatro di Torino)에서 브람스의 마-단조 교향곡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일 악장의 구성에 모든 상승이나 점층이 결여되었다며 그칠 줄 모르게 혹평하면서 이런 "함부르크 (브람스의 고향)의 비오는 날씨 분위기"를 비웃었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또한 리터를 통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학설에 접하게 되었다. 이 마이닝엔 시절 음악 외에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스캇 놀이를 배웠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하면 정열을 가지고 하는 슈트라우스는 저명 인사들 중 제일 유명한 스캇 놀이자가 되었다. 스캇 놀이하는 시간은 그의 생활에서 음악이 배제된 유일한 순간으로 원기를 되찾는 행위였다고 한다.

1886년 8월 뮌헨의 궁정오페라단의 제 3 지휘자로 (헤르만 레비, 프란츠 폰 피셔 Franz von Fischer) 가기전 슈트라우스는 부친의 후원을 받아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베로나, 볼로냐, 로마, 나폴리, 플로렌츠를 돌아 보았는데 교향 환상곡 "이탈리아로부터 (Aus Italien op.16)"는 이 여행의 열매다. 겉으로 보아 베토벤의 "전원"교향곡과 유사한 이 작품으로 슈트라우스는 리스트의 원리에 따른 작곡을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초연은 1887년 3월 뮌헨에서 슈트라우스의 지휘로 이루어졌는데 물의를 일으킨 첫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그의 최초의 교향시 "맥베트 (Macbeth op. 23)" 작곡에 착수했다. 이 곡은 마이닝엔 연극단이 공연한 동명의 섹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작품에 크게 감명을 받아 쓰게 되었는데 뷜로의 충고로 개정하여 1888년 완성한 작품이다. 마이닝엔의 게오르크 (Georg II.) 대공은 음악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연극단을 직접 경영하고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마이닝엔에 머물던 겨울 이 연극단은 때마침 순회 공연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는 그 유명한 마이닝엔 연극을 저녁마다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뮌헨의 제 3 지휘자로서의 업무는 그리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의미없이 되풀이하는 일에 별로 강하지 않았던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오페라 상연에 있어 습관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많은 일이 큰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 작품 선정에도 별 영향을 미칠 수 없어 흥미없고 지루한 오페라를 지휘해야 하는 등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자기 작품 바-단조 교향곡이 독일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그리고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성공적으로 연주되고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이탈리아로부터"도 프랑크푸르트와 쾰른 (Koeln)에서 열렬히 환영받는 것을 보며 뮌헨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가까스로 임기를 채운 슈트라우스는 다시 뷜로의 중개로 1889년 제 2 지휘자로 바이마르 (Weimar)로 간다.

지휘자 생활은 보잘 것 없었으나 뮌헨에서 작곡 생활은 꾸준하여 바이마르로 가기 전 바이올린 소나타 (op.18), 아돌프 폰 솩 (Adolf von Schack)과 페릭스 다안 (Felix Dahn) 의 시에 붙인 가곡 (op.19, 21, 22)외에 대 규모의 교향시 돈 쥬앙 (Don Juan op. 20)을 완성했다. 니콜라우스 레나우 (Nikolaus Lenau)의 시에 근거를 둔 이 교향시에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이해를 돕기 위한 서문을 두었는데 작곡 동기는 시의 내용보다는 지배적 분위기와 19세기에 만연한, 여인을 통해 구제되는 것을 갈망한다는 낭만적인 관념에 있었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이 뮌헨 시절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이자 최초의 포괄적인 슈트라우스 전기를 써낸 (1911년) 막스 쉬타이닛쩌 (Max Steinitzer)로부터 일생을 반려할 파울리네 데 아나 (Pauline de Ahna)를 성악 학생으로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쉬타른베르거 호수 (Starnberger See)에서 익사한 루드비히 제 2세의 관을 지키기도 한 저명한 장군이었는데 음악을 상당히 좋아할 뿐더러 재능도 풍부하여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제 삼막에 나오는 이중창 (한스 작스 - 발터)을 혼자 연습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곧 뮌헨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기도 한 파울리네가 보기 드문 소질을 갖췄다고 판단했고 그녀도 거장의 잠재력을 그에게서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슈트라우스가 바이마르로 갈 때 그녀도 몇몇 학생들과 함께 그의 제자로 따라갔다. 파울리네는 곧 궁정 극장의 독창가로 활약했으며 후에 슈트라우스의 가곡의 해석자로 이름을 떨쳤다.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 생애에 단 한명의 의미있는 여인이었다. 이로써 그는 행복한 가정 생활도 영위한 보기 드문 음악가가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교향시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 세번째 단락에 그녀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고 세상 뜨기 이년 전인 1947년 (바그너의 탄생 124주년을 맞아) 파울리네와의 만남과 그녀의 뛰어난 가창 능력에 대한 찬사의 기록을 남겼다.

바이마르의 제 1 지휘자 에두아르트 라쎈 (Eduard Lassen)은 슈트라우스에게 거의 모든 독일 오페라 상연 곡목을 선정하도록 하였고 연 4회의 정기 연주회도 맡겨 뮌헨에서와는 달리 지휘자로서 신명나는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소신껏 일을 펼칠 수 있었다. 취임사에서 한때 리스트가 활동하던 이곳에서 그의 근본 정신을 잇는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한 슈트라우스는 둔해진 오페라 경영 체제를 개혁하여 전체적인 음악 활동에 추진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그는 관현악주자가 모자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로엔그린", "탄호이저",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 (Der fliegende Hollaender)",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였다. 목적을 향하여 지칠줄 모르게 일하던 슈트라우스는 연출가나 의상 재단사의 기능까지 겸해야 했는데 부족한 예산으로 한계가 분명했어도 예술적 균형을 보인 그의 "로엔그린"은 코지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교향곡 연주회외에 모차르트의 "돈 죠반니 (Don Giovanni)", "마적 (Die Zauberfloete)", 베버의 "마탄의 사수", "오이뤼안테(Euryanthe)",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니 (Iphigenie in Aulis)" 그리고 리터를 포함한 몇몇 신진 작가들의 오페라도 상연하였다.

그 자신 창작 생활은 바이마르 시절 미미하여 최초의 오페라 군트람 (Guntram op. 25)과 약간의 가곡 외에 별 수확이 없던 기간이었다고 회상하였지만 1889년 "돈 쥬앙", 1890년 "죽음과 변용 (Tod und Verklaerung op. 24)", "맥베트",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익살극"이 초연되면서 작곡가 슈트라우스의 이름은 널리 퍼져나갔다. "돈 쥬앙"은 그 당시 현대 작곡가인 그에게 처음으로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쉴새없이 일하던 슈트라우스는 1891년 폐렴에 걸렸다. 일년 후에 다시 늑막염을 얻게 되자 이런 조카의 완쾌를 위해 외삼촌 게오르크는 요양 여행비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팔개월간 이집트 여행 (1892/93)을 떠날 수 있었는데 11월 삼주간 먼저 그리스의 코르푸 (Korfu), 올림피아 (Olympia), 아테네 (Athen)에 머물며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때 기원전 사 오세기경의 그리스 예술 세계와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어 훗날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여러 음악극 창작의 직접적인 원천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브린디지 (Brindisi)에서 증기선을 타고 오는 도중 코르푸 섬과 알바니아의 파란 산을 보는 순간부터 "그리스정신을 가진 게르만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하였다. 이집트에 도착하여서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고대 이집트 신전은 그리스 신전보다 훨씬 거대하지만 품위와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뒤진다고 하면서 전자를 바흐의 내림 나-단조 미사로 후자를 모차르트의 사-단조 교향곡으로 비유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스를 사랑하는 슈트라우스의 마음은 평생 변치 않아서 세상 뜨기 석달 전에 쓴 마지막 글 (1949년 6월 19일)에서도 자신을 위와 같이 칭하였다.

이집트의 룩소르 (Luxor)에서 그는 "군트람"의 제 일막 관현악 총보를 완료하였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작품에 대한 엄청난 경외심으로 당시 오페라 작곡에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또한 리터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그는 오페라 작곡가는 반드시 대본까지 직접 써야 한다는 견해였는데 자신이 별다른 문학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중세 가인 수도원의 회원인 "군트람"을 소재로 한 이 오페라를 빈의 한 신문 (Neue Freie Presse) 기사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되어 착수하였다. 그는 리터의 끊이지 않은 격려와 협력의 덕분으로 악극 첫 작품의 작시 작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1888년 3월 초안을 잡아 1893년 9월 완성한 "군트람"은 바이마르에서 다음해 5월 초연되었으나 큰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궁정악단 상황에 무리가 되는, 대규모 관현악단을 요하는 오페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든 성부 때문이었다. 그후 다른 도시에서 무대에 올려 보려는 시도는 모두 좌초되고 단 한번의 뮌헨 공연(1895)은 여러 가지 이유로 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악극이 다시 상연된 것은 45년 후인 1940년 바이마르에서였다.

6.  다시 고향으로

"군트람"이 초연되던 1894년 슈트라우스는 많은 일을 치렀다. 군트람의 총연습이 끝난 뒤 파울리네와 약혼하고 9월엔 결혼했다. 또 처음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탄호이저")하게 되었지만 안타까운 일도 있었으니 많은 연주 여행으로 쇠약해진 뷜로가 슈트라우스의 권유로 이집트에 요양하러 갔는데 도착한지 며칠 안되어 그만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겨울에는 뷜로가 맡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도 또한 처음으로 지휘해 볼 수 있었다.

바이마르에서 임기를 마친 후 슈트라우스는 좋은 조건이라 생각하고 10월 1일 병약해진 레비를 대리하는 제 1 지휘자로 다시 뮌헨으로 갔다. 그는 많은 오페라를 새로 연습하여야 했다. 1895년 8월에서 9월에 걸쳐 있던 바그너 축제때는 12작품의 오페라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두번째의 뮌헨 시절 그가 남긴 공적이라면 오페라 지휘자로서 무대 감독 포싸르트 (Ernst von Possart)와 함께 모차르트의 걸작 ("후궁으로 부터의 탈출 ", "돈 죠반니", "코지 판 툿데", "마적")을 근본적으로 새로 연습하고 무대 연출의 혁신을 가하여 레비와 함께 ("피가로의 결혼"으로 그는 이 작업을 시작했다) 이곳에 "모차르트 르네상스"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두번째의 활동 영역은 레비가 지휘하던 오데온의 정기 연주회였는데 1896년까지 이 년 동안만 이끌 수 있었다. 음악 해석과 프로그램 선정이 너무 현대적이라며 범용한 에르트만스되르퍼 (Max von Erdmannsdoerfer)에게 지휘권이 넘겨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슈트라우스가 바이마르에 있는 동안 뮌헨의 보수성과 후진성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군트람 " 상연이 대 실패를 보고 특히 뮌헨의 바그너 숭배자들로부터 바그너 오페라 지휘에 대한 비난을 받는 등 이번에도 뮌헨에서의 지휘자 생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객원 지휘자로 많은 곳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이럴 때마다 자기 작품을 연주 곡목에 포함시켜 독일의 도시 (쾰른,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Stuttgart, 뉘른베르크 Nuernberg)뿐만 아니라 외국 (파리, 바르쎌로나, 마드리드, 모스코바, 브뤼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슈트라우스는 1898년 현재의 지위로 평생 계약을 맺도록 제안 받았으나 그에게 적대적인 음악 감독 페어팔 (Karl Theodor Emanuel Freiherr von Perfall)이 마지막 순간에 이미 협정된 봉급까지 경감하려 하자 고향을 아주 떠나버릴 것을 결심한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그는 곧바로 베를린으로 갔다. 때마침 궁정 오페라단의 제 1 지휘자 바인가르트 (Felix von Weingartner)의 임기가 끝나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894/95년 (뷜로의 문하생으로)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정기 연주회를 성공리에 지휘한 슈트라우스는 당시 베를린 궁정의 주요 인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 곧바로 바인가르트의 후임자로 선정되었고 뮌헨으로는 통쾌하게 해약 통지를 보낼 수 있었다.

이 사년간의 뮌헨 시절(1894-1898)에 슈트라우스는 교향시 "틸 오일렌쉬피겔의 유쾌한 장난 (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 op. 28)",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op. 30)"와 "동키호테 (Don Quixote op. 35)"를 작곡하였다. 당시 그의 현대성은 음악회 프로그램 선정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도 뚜렷하여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14 세기의 독일의 익살꾼 틸 오일렌쉬피겔을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 제시되는 무모하고 오만방자한 틸-주제가 이해될 리 없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슈트라우스는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이 니췌 (Friedrich Nietsche)가 말하는 "초인간"이 되기 위하여 거치는 여러 발전 단계를 지극히 인간적인 차원으로 명시해 보였는데 니췌를 흠모하는 이들은 슈트라우스가 니췌의 문학 작품을 음악으로 번역하여 감히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고 해석했다. 17세기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소설에 따른 "동키호테"는 보수적인 청중에게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예를 들자면 슈트라우스의 관현악법 구사의 극치를 보여 주는 이 환상적 변주곡에서 양들이 매매거리는 것을 묘사한 부분이 연주되자 파리의 청중은 마치 희롱당하고 있다고 여겼다. 뜻밖에도 한때 극히 보수적이던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현대적 작품에 이해를 보여 어렵던 이 시절 큰 위안이 되었다.

7.  베를린 그리고 오페라 작곡

뮌헨인들이 창작 활동도 중시하는 지휘자보다 지휘에만 집중하는 지휘자를 고용하려고 한 반면 베를린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슈트라우스같이 유명한 작곡가를 지휘자로 초빙하게 되는 것을 오히려 뜻깊게 생각하여 작곡을 위한 휴가 기간이나 작품을 전파하기 위한 연주 여행에 호의를 보였다. 높은 봉급외에 두달간의 여름- 그리고 한달간의 겨울휴가가 주어지는 유리한 계약을 마치고 슈트라우스는 아내 그리고 그 동안 태어난 아들 (1897)과 함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당시 미국의 뉴욕에서 더 많은 보수를 제공했으나 거절했다. 그에겐 안전성이 부족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우선 유럽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98년 11월 5일 바그너의 "트리스탄"으로 그는 데뷔 연주를 성공리에 마쳤다. 관현악단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다섯살 연상의 동료인 카를 무크(Carl Muck)와 원만한 사이를 이루었을 뿐더러 어디서나 존경을 받고 호감을 사는 매우 만족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연주회 활동을 펼 관현악단을 갖지 못했다. 바인가르트너가 카임 (Kaim)-관현악단 (현재 뮌히너 필하모니커의 전신) 지휘자로 뮌헨으로 갈때 오페라 관현악단의 음악회 지휘를 1908년까지 계속 맡기로 약속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뮌헨의 슈트라우스는 베를린으로, 베를린의 바인가르트는 뮌헨으로 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동시대의 작품에 개방적인 그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간단히 "베를린 음악가 관현악단 (Berliner Tonkuenstlerorchester 1901-1903)"이라는 악단을 창단하여 리스트, 브룩크너의 작품, 그리고 당시 빈의 궁정오페라단과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이끄는 구스타프 마알러 (Gustav Mahler) 의 교향곡 등 동시대 음악가의 새로운 작품을 연주하였다. 물론 자신의 곡도 잊지 않고 프로그램에 포함하였다. 생존시 마알러도 자신의 음악회에서 슈트라우스곡을 지휘하여 답례하였는데 이 동료의 음악이 불멸하리라는 확신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1902년 봄 이 관현악단과 남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남불란서, 스위스로 순회 공연도 하였다.

뮌헨을 떠나 베를린으로 온 것은 슈트라우스 인생에 있어 전환점을 뜻한다. 즉 베를린에서 최고의 예술적 성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작곡가 그리고 지휘자로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미 뮌헨에서 계획했던 두 작품을 여기에 와서 완성했는데 과거의 작품과는 달리 특정한 문학적 견본이 없는 교향시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 op. 40)"와 두번째의 오페라 "꺼진 불 (Feuersnot op. 50)"이다. 자서전적이 색채가 다분한 "영웅의 생애"를 발표함으로써 슈트라우스는 교향시 작곡가로서 이름을 굳혔다. 독일적인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불란서의 문예가요 비평가인, 그리고 "틸 오일렌쉬피겔"에 대해선 조건적이던 반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결점없는 작품이라고 칭찬했던 로망 로랑 (Romain Rolland)은 이 "영웅의 생애"를 듣고 실제로 누가 이 작품에 등장한 건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를 찾아가 물었는데 사실 작품에 바탕이 되는 줄거리는 있지만, 그냥 한 영웅이 적과 싸우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족하다는 대답을 듣는다. 끊이지 않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환상 변주곡 "동키호테"의 목차를 나중에 마지 못해 발표했듯이 음악 자체로 받아 들여지고 이해되어야 할 교향시가 문학화 될까봐 크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첫번째 오페라 "군트람"이 실패로 돌아가자 슈트라우스는 오페라 작곡에 다소 용기를 잃었다. 이런 중에 1843년 라이프치히 (Leipzig)에서 발행된 프랑드르 사람의 전설 모음집 (번호 407)에 나오는 "아우데나르데의 꺼진 불 (Das erloschene Feuer von Audenarde)"을 읽으며 적당한 소재를 찾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전설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 어린 하녀는 창 밖에 있는 구혼자를 광주리에 실어 자기 방으로 끌어 올리다가 도중에 중단하였다.공중에 매달려 있게 된 그는 그래서 많은 사람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한 늙은 마술사는 징벌로 그 도시의 모든 불과 빛을 꺼 버렸다. 시치미 떼던 그녀는 옷을 벗고 탁자 위에 올라 서야 했고 모든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녀 등에서 튀어 나오는 불꽃으로 장작과 등불을 다시 점화할 수 있게 되었다.

위의 제재에서 슈트라우스는 고향의 오페라 극장과 그리고 예술에 대해 고루하고 좁은 견해를 가진 소시민들에게 반감을 나타내는 막간극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30년전 그가 흠모하던 바그너에게 그러했듯이 자신을 마구 대접하던 뮌헨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가사를 담당한 에른스트 폰 볼초겐 (Ernst von Wolzogen)은 12세기경 일어났던 이야기를 뮌헨의 당시 상황에 맞추어 조정하여 줄거리에 시사성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진행되는 내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즉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바이에른 사람들 특유의 우락 부락한 언어까지 거리낌없이 사용하여 이 오페라는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요즘은 바로 이런 토속성이 내용 이해에 방해가 되어 자주 상연되지는 않는다. 각본에 걸맞게 슈트라우스는 군데 군데 바그너 음악과 바그너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군트람"을 인용하였지만 그의 음악 양식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다. 뮌헨에서 전통적으로 맥주 마실때 부르던 노래 곡조를 수용했는가 하면 약 10년후의 오페라 "장미기사"에 자주 나오는 월츠 (Walzer)리듬도 선취했고, 바이올린과 첼로 독주를 끼어 넣는 등 관현악기의 특별한 취급으로 슈트라우스 특유의 음악적 어법과 무지개빛 음색이 완연하다. 초연은 1901년 11월 드레스덴 (Dresden)에서 오스트리아인 에른스트 폰 슈흐 (Ernst von Schuch)의 지휘아래 진행되었는데 이어서 베를린, 빈, 뮌헨에서도 연주되었다. 음란스럽거나 성애를 예찬하는 가사도 포함하고 있는 이 오페라는 엄격한 검열청의 관리를 받고 있던 빈이나 베를린에서 문제가 되었다. 베를린에서는 각본을 수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황후가 불쾌해 하여 일곱번 상연후 막을 내려야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꺼진 불"로 슈트라우스가 오페라 작곡에 맛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오페라 쟝르에 적극적으로 손을 대게 된다. 그와는 달리 교향시 작곡은 감퇴하여 창작기 전반 (교향시 작곡의 기간)과 후반 (오페라 작곡의 기간)이 대조를 이루게 된다. 반면 가곡은 성악가의 아내를 둔 만큼 전 창작 기간에 걸쳐 작곡하였다.

8.  오페라 "잘로메"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의 일막짜리 희곡 - 헤드비히 라흐만 (Hedwig Lachmann)의 독일어 번역판 - 을 토대로 하여 이년간에 걸쳐 (1903-1905) 작곡한 "잘로메 (Salome op. 54)"는 슈트라우스의 세번째 오페라인데 이 작품으로 그는 드디어 오페라 작곡가로서도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일반 오페라 관현악단이 성부를 반주하는 구실을 해왔다면 "잘로메"의 관현악부는 성부와 병행하는 위치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중요시되어 최초의 "교향악오페라"라고도 하는데 육감적이며 끔찍한 내용도 그러하려니와 이국풍의 화성, 잦은 박자의 변화와 풍부한 당김음의 사용으로 명료하지 않은 리듬 그리고 독특한 관현악단의 색채등으로 오페라 무대에 있어 기존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여곡절을 거친 후 "잘로메"는 마침내 드레스덴에서 1905년 12월 9일 초연되었다. 이번에도 관현악단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고 가수를 적재 적소에 배치하기로 이름난 슈흐가 지휘하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의 전아한 연주로도 이름난 그는 드레스덴의 음악 감독 제에바흐(Graf Nicolaus von Seebach)백작과 함께 슈트라우스 오페라 작곡과 상연에 큰 도움을 준 후원자가 되었다.

새로운 창작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더더구나 "잘로메"와 같은 획기적인 작품은 많은 사람을 어리둥절케 하였다. 그래서 이 가극의 독창성과 시대적 중요성을 간파한 지휘자 마알러나 니키쉬 (Arthur Nikisch)같은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스캔들로 간주하거나 곧 사라져 버릴 오페라라고 단정한 사람도 많았다. 평소에 호의적이던 코지마 바그너도 슈트라우스가 몇 군데 피아노로 연주하자 한마디로 광란이라며 일축했고 초연 삼주 후엔 그녀의 사위인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교수 헨리 토데 (Henry Thode)가 베를린의 한 강연에서 슈트라우스가 성도착증을 묘사함으로 신성한 음악을 모독했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벌써 국내외 열 극장에서 이 오페라를 채택하여 슈트라우스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0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토스카니니가, 투린에서는 슈트라우스가 지휘하였고 이어서 나폴리, 벨기에의 브뤼쎌, 불란서 파리 등지에서 "잘로메"가 상연되었는데 종교적인 문제로 어디에서나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빈에서는 피플 (Piffl)이라는 주교와 까다로운 서신 왕래후 1918년에야 연주될 수 있었고 뉴욕에서는 청교도들의 항의로 초연후 중단해야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제 2 세 (Wilhelm II.)는 낙천적인 결말이 나는 조건으로 상연 허가를 내렸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상연할 때는 작품 끝에 세 동방박사의 출현을 예시하는 샛별을 등장시켰다.

불란서 작곡가 폴 뒤카 (Paul Dukas)는 "잘로메"를 듣고 난 뒤 그때까지 관현악법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많은 비결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했노라고 했다는데 이 관능의 음향을 창조해 낸 1905년 슈트라우스는 유명한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의 "악기편성법"이란 책을 개정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잘로메"를 작곡함으로 그는 독일 남부 국경의 한 요양지 가르미쉬 파르텐키르헨 (Garmisch-Partenkirchen)에 별장을 지을 수 있었다. 신선한 공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며 즐겨 산을 찾던 슈트라우스는 1906년 독일의 최고봉인 축쉬핏쩨 (Zugspitze)가 보이며 인적이 드문 산 기슭에 대지를 사고, 알프스가 시작되는 곳에 이미 여러 훌륭한 저택을 지어 이름난 건축가 에마누엘 폰 자이들 (Emanuel von Seidl)로 하여금 산장을 짓게 하였다. 화려하다기 보다는 품위있는 쾌적감을 주는 이 유겐트 양식 (Jugendstil)의 시골 별장은 작곡할 때면 철저히 혼자 있고 싶어했고 햇볕과 온기를 특별히 필요로 했던 슈트라우스에게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였다. 1908년 여름 처음으로 이 별장에서 지낼 수 있었는데 겨울이면 지휘등 공식적인 행사로 숨가쁜 도시 생활을 하다가 여름이면 이곳에 돌아와 작곡에 전념하였다. 오페라 "엘렉트라"는 여기서 완성한 첫 작품이었다. 이 후에 그는 약간의 말년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이 산장에서 작곡하였다.

어릴 적 부터 부모를 따라 도보 여행을 하여 바이에른 고산계의 풍경과 접촉이 풍부했던 자연인 슈트라우스는 "알프스 교향곡 (Eine Alpensinfonie op. 64)"을 작곡함으로 고향과의 깊은 연계를 표시하였다. 그는 또한 그 어디에도 바이에른의 공기보다 더 좋은 공기가 없다고 하였다. 이 교향시에는 등반자가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다양한 모습이 서술되어 있는데 관현악 총보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밤--해돋이--등반--숲속으로 입장-- 실개천을 따라서--폭포--꽃이 만발한 초지-- 고원 목장--덤불 속의 미로--얼음 덮힌 산--위태로운 순간--정상에서--환상-- 피어 오르는 안개--태양은 구름으로 점점 가려지다--애가--폭풍전의 정적--뇌우와 폭풍-- 하강--해지기--종결--밤. 소재가 이런만큼 거대한 관현악단이 동원되는데 실감있는 묘사를 위해 슈트라우스는 젖소 목방울, 바람소리와 천둥소리를 내는 기계까지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다. 1911년 스케치하기 시작하여 1915년 2월 끝낸 "알프스 교향곡"은 교향시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을 자신의 지휘 (드레스덴 궁정악단)로 같은 해 10월 28일 베를린에서 처음 소개하였는데 총연습을 한 후 그 자신이 "나는 이제 드디어 관현악 편곡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을 정도로 관현악 색채 효과가 뛰어난 작품이다.

9.  인간 슈트라우스

생활의 고난을 모랐던 슈트라우스는 예술가로도 별 어려움 없이 성공의 길에 들어 설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 삶의 특징이라면 바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이거나 사색적 나아가서 번민하는 것은 그와는 먼 세상이었다. 작곡하는 것도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런 활동의 하나였다. 어떤 작곡가가 마침내 성공을 가져다 준 한 오페라 작곡을 위해 굉장히 힘들고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도대체 그는 왜 작곡하기 어려울 때 작곡을 한단 말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리가 길어 큰 키에 푸른 눈과 낭랑한 테노 목소리를 가진 슈트라우스는 겉으로 보기에 통상적인 코밑 수염을 길렀을 뿐 단정한 조발로 일반 시민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예술가로서 그는 감상적인 염세 감정이나 비장함 또는 당시 유행병이뎐 비관주의에 빠지는 일도 없었던 "건강한" 예술가였다. 이렇듯 그는 또한 양면성을 적절히 소유한 사람으로 순박하나 빈틈이 없고 직관적이지만 이성으로 통제하며 중용을 지키면서도 단호할 수 있어서 어떤 상황에 처하나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곳곳에서 지휘를 하던 슈트라우스는 1904년 (2월 23일-4월 28일) 처음으로 미국 연주 여행에 나섰다. 총 35회에 달하는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는데 부인 파울리네도 가곡의 밤으로 성공적인 연주 여행에 커다란 몫을 하였다. 이 미국 순회 공연중 슈트라우스는 뉴욕의 한 백화점 (Wannemaker)에서 오전 공연을 해 줄 것을 요청받자 조건을 살피고는 곧 응낙하였다. 엄청난 광고 효과를 생각한 주최측이 충분한 사례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이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자 비판이 쇄도하였다. 이러자 슈트라우스는 한 음악 잡지에 (Berliner Allgemeine Musikzeitung) 글을 보내 자기 입장을 밝혔다: "진정한 예술은 모든 회당을 고귀하게 만들며 처자를 위해 진실히 돈버는 일은 결코 예술가를 모욕하는 일이 아닙니다." 슈트라우스는 숨겨진 천재로 살지 않았던 것처럼 이상에만 잠겨 현실을 도외시한 예술가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기질상 서로 다른 부모로부터 상호 보충하는 면을 다 물려 받았다. 그래서 어머니 쪽으로는 온화한 인간미와 더불어 건강한 영리심을, 아버지 쪽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엄하고 단호한만큼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도 이어 받아 항상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고향 뮌헨을 떠나 베를린으로 갈때를 생각해 보라. 반면에 그는 남에게 관대하기도 하여 성공한 음악가로서 동료나 후배중 누구든지 약간이라도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듯이 보이면 우선 도와 주고 장려하였다. 과대 평가하는 건지 모른다는 우려 보다는 시간이 판가름하게 될테니 발전에 길을 터주자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등산가로 단단하면서도 탄력있는 걸음을 걷던 그는 현실감과 더불어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감각을 가져 세재에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위태로운 음악가의 실존을 늘 의식해 온 그는 베를린으로 온 해인1898년 친구인 프리드리히 뢰쉬 (Friedrich Roesch) 그리고 한스 좀머 (Hans Sommer)와 더불어 "독일 작곡가 조합 (Die Genossenschaft deutscher Komponisten)"을 창립한 이래 일반 작곡가의 이익을 위해 앞장 섰다. (뢰쉬는 슈트라우스의 학교 동창으로 법률가에서 음악가로 전향하였고 좀머는 25년간 브라운쉬바익 Brauschweig 의 수학 교수로 있다가 음악에 전념하려고 교수직을 내 놓은 음악가로 슈트라우스가 바이마르에 있을 때 알게 되었다.) 즉 사회가 음악 작품을 각 작곡가의 정신적인 소유물로 인정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작곡가의 곡이 연주될 때마다 그 작곡가에게 상연료가 지불되도록 하였다. 그전에는 한 작품이 일단 출판되면 상연권까지 출판사에 속했다. 슈트라우스는 서류 작성과 취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그 당시 적지 않은 동료들이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의심스러워 하는 반응을 보여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추진시켜 저작권 보호 활동의 성공적인 개척자가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인격을 구성하는 또하나의 요소라면 세련된 문벌가의 자의식을 꼽을 수 있겠다. 1904년 연주 여행 중 뉴욕의 마지막 슈트라우스 축제음악회 날 (3월 21일) 그는 뉴욕 관현악단으로 카네기 홀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헌정한 "가정 교향곡 (Sinfonia domestica op. 53)"을 초연하였다. 이 곡으로 그는 "영웅의 생애"와 "꺼진 불" 이후 또다시 노골적으로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서술했다하여 비난을 샀다. 그의 입장은 로망 롤랑에게 쓴 편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무슨 이유로 나와 관련된 교향곡을 작곡해서는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나는 내 자신이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만큼 흥미롭다고 봅니다." 슈트라우스는 죽기 직전까지 예술 작품은 그를 창조한 이의 반사경이라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슈트라우스는 문학사가들이 특히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작품의 한 문장을 놓고도 괴테라는 인물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면밀하게 연구를 하는데 음악인들은 자기 작품의 이런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가정 교향곡"은 열광적인 환호 속에 울려 퍼졌다. 슈트라우스가 이 교향곡을 작곡할 때 약 200 쪽에 달하는 작품 길이 (연주 시간 대략 41-44분)와 거대한 악기 편성에 대해 걱정하던 그의 아버지는 이 소식을 받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지휘할 때 너무 몸을 많이 움직이지 말아라 (슈트라우스가 나이 들어서는 손목으로 박자만 세는 듯이 지휘했지만 젊었을 때는 그와 반대였다.), "돈 쥬앙 " 총보를 보고 금관 악기를 좀 아껴서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던 그는 이번에도 "가정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서는 안되는 법이란다"하며 충고를 잊지 않았었다. 이런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1905년 "잘로메"가 완성되기 바로 직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몇달전에 아들이 이 오페라에 나오는 여러 부분을 피아노로 쳐보일 때 초연후의 소동을 예상하기라도 하듯이 "아이고, 이 안절부절 못하는 음악! 마치 이리 저리 기어다니는 오월 풍뎅이가 잔뜩 든 바지를 입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라고도 하던 아버지의 죽음은 슈트라우스에게 커다란 손실이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외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프란츠라고 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손실은 곧 빈의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 (Hugo von Hofmannsthal)과의 생산적인 만남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작곡 활동은 그를 리브레티스트 (가극 각본작가)로 얻은 후 본격화 되었기 때문이다.

10.  각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

"잘로메"가 대성공을 이루자 슈트라우스는 다음 오페라를 위한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호프만스탈의 "엘렉트라 (Elektra)"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1906년 일단 막스 라인하르트 (Max Reinhardt) 연출의 이 연극을 베를린에서 보았는데 훌륭한 오페라 가사를 만들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리하여 오페라 여섯 작품에 이르는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의 역사적 공동 작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미 1900년 3월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해 말 호프만스탈은 발레를 위한 한 각본 ("시간의 승리")을 슈트라우스에게 보였는데 좋다는 생각은 했으나 여러 다른 계획이 있어 정작 작곡하리라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이 편지에는 다른 제안을 하도록 고무하는 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지금 서로가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 느낌마저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작곡을 하려니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엘렉트라"의 내용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로메"와 병치하는 요소가 많았던 것이다. 둘 다 사람 목숨을 요구하는 공주에 대한 이야기며 결국 이들도 죽는다는 공통점을 두고 잇달아 작곡하기엔 무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에 손대기 전 호프만스탈의 다른 작품을 먼저 오페라로 작곡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악령에 신들려 망아인 그리스 정신을 표현해 보고자 하는 동경으로 결국 모든 망설임을 극복하고 1906년말 초안을 잡아 1907년부터 작곡에 들어 갔다. 지휘 활동으로 자주 중단해야 했지만 1908년 9월에 완성하여 1909년 1월 25일 드레스덴에서 초연을 보게 되었다. 성실한 지휘자 슈흐는 이번에도 주도 면밀한 준비를 하였고 배역도 험잡을 곳이 없어 만족스런 공연이었다. 단지 클뤼템네스트라 (Klytaemnestra)역으로 특별히 유명한 바그너 가수 슈만 하인크 (Ernestine Schumann-Heink)를 초청한 일은 실책으로 밝혀졌다. 왜냐하면 슈트라우스의 노래 가락 양식은 이제 바그너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극문학의 낭독 속도를 가진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성부는 다성적인 관현악부나 그의 수식음과 자주 마찰하면서 독자성을 지니게 된다. 슈트라우스는 "잘로메" 때부터 내용에 있어 독일적인 배경을 떠났듯이 음악에서도 바그너의 영향권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세상 뜰 때까지 바그너 숭배자였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제 자기 특유의 표현 양식을 뚜렷이 구축하게 된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업적은 이미 문학적 가치가 높은 호프만스탈의 "엘렉트라"를 음악에 붙여 효과를 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등장 인물과 줄거리의 섬뜩하고 병적인 면을 각 주제의 선율과 리듬 구성을 통해 묘사하였고, 많은 동기를 대위법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얻은 불협화음으로 입체적인 표현을 가했다. 이러는 가운데 생성되는 복조화음이 계속 연결되면서 거의 무조에 이르는 화성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그렇지만 현악기군을 세분하여, 음향의 강도에 있서 정밀히 규정된 관현악부 덕분으로 잘 된 연주에서는 조야한 소리가 나지도 않을 뿐더러 성부가 오히려 선명하고 효과적으로 지속된다. 당시에 외형적으로 "잘로메"에 견줄 만한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곧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헝가리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의 오페라극장에 보내졌다. 오늘날 많은 음악인들은 "엘렉트라"를 슈트라우스가 남긴 작품의 절정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모차르트의 여러 걸작 오페라를 직접 지휘하던 뮌헨 시절부터 슈트라우스는 자신도 이런 희가극을 써 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 왔다. 그의 이런 염원은 "장미기사 (Der Rosenkavalier)"로 15년 후에 성취되었다. 작품 번호 59의 "장미기사"는 삼막의 희극이다. "엘렉트라"의 초연이 끝나고 한달도 채 안된 2월 11일 호프만스탈은 슈트라우스에게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황후 시대 빈에서 일어나는 한 희가극을 구상했노라고 편지하였다. 슈트라우스는 곧 그를 베를린으로 오게 하여 줄거리를 듣고는 비록 일반 대중이 다른 종류의 희가극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도 작곡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당시 창작력이 최고도에 달해 있던 슈트라우스는 리브레티스트 호프만스탈이 가사를 보내오자 마자 곡을 부칠 수 있어서 17개월 (1909년 5월-1910년 9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오페라는 1911년 우연하게도 모차르트 생일 전야 그리고 슈트라우스가 좋아 하던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툿데"의 초연일인 1월 26일 슈흐의 지휘로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다. 작곡할 때 품었던 슈트라우스의 의구심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장미기사"는 잇달아 50회 공연의 입장표가 금방 매진되는 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2월에는 고향 뮌헨에서 펠릭스 모틀 (Felix Mottl) 지휘로 개가를 올렸고 베를린에서는 드레스덴까지 특별 열차가 개통되어 베를린 시민도 그들의 지휘자 슈트라우스의 새 오페라를 곧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밀라노와 프라하의 공연이 따랐는데 이 작품은 오페라 감상을 하는 일반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모아 결과적으로 "잘로메"의 성공을 능가하였다. 이제 슈트라우스는 살아 있는 오페라 작곡가의 거장으로 국제적 명망을 누리게 되었다.

"장미기사"는 빈사람들의 로코코 연극, 오페라 부파 그리고 익살극이 섞인 오페라인데 사건이 빈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됨으로써 특별한 점수를 따게 된다. 노래와 열애의 도시 빈은 유럽의 특별한 대도시다. 도시의 세련성이 존재하면서도 자연스러우며, 여기서는 은밀하거나 허튼 소리, 거드름 피우기가 통하고 중요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경시될 수 있어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빈 특유의 분위기 덕분으로 "비도덕적"인 장미기사의 내용은 청중에게 거슬리기는 커녕 오히려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향토색을 양식화하는 수단으로 각본에 빈의 방언이 사용되었다. 서창과 영창은 그리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사건 진행은 담화체로 작곡되었다. 가끔 대화도 삽입되어 있는데 독창이나 이중창에는 "꺼진 불"에서와 같이 통속적인 선율이 이용되었다. 형식으로 보아 이 오페라는 독백, 이중창, 삼중창, 앙상블등의 완결된 구성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모차르트와의 연계를 이룬다.

오페라 "장미기사"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춤곡 월츠가 전 작품을 효과적이며 탁월하게 얽어매고 있기 때문이다. 월츠는 여기서 표현 양식을 고정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인물 묘사와 인물 사이의 정신적 관계을 연결시키는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의 내용에 월츠는 시대 착오다. 당시 귀족들은 미뉴에트 춤을 추었을 뿐더러 월츠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중적인 랜들러 (Laendler)나 독일 춤곡 (Deutscher Tanz)으로 부터 발전한 월츠는 요한 슈트라우스 (Johann Strauss)나 요제프 란너 (Joseph Lanner)같은 오스트리아의 경음악 작곡가에 의해 순화되고 정제되어 1820년 부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음식점, 서민층에서만 연주되다가 점차 궁중 무도회장까지 진입하게 되었고, 곧 전 유럽에 퍼져 세계 제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가장 일반화된 춤곡이었다. 빈에서는 월츠로 인한 행복감이 생활 양식에까지 깊히 뿌리를 내릴 정도였다. 그래서 고등 교육을 받은 슈트라우스도 (월츠는 빈에서 늘 연주되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언제 새로 형성된 춤곡이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당시의 월츠를 섬세한 화성 변화나 변조로 더욱 감격스럽고 유혹적으로 들리게 만들어 세련성과 속세성을 강화하였지만 간결성과 단순성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빈 특유의 쾌적하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오페라가 많은 청중으로 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게 된 구체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운 음악 언어를 추구하는 가운데 관현악부는 "잘로메"나 "엘렉트라 "에 비해 경감되어 새롭게 다루어졌다. 친밀한 장면에서는 가사의 좋은 전달을 위해 투명하고 실내악적인 표현 방식이 사용되었다. "장미기사"는 황태자의 권고로 모든 예술 분야의 현대적인 추세를 꺼려한 독일의 황제가 들은 단 한편의 슈트라우스 오페라였다. (베를린에서 황후를 위해 입궐할 자격이 있도록 가사를 수정하여 상연해야 했는데 역시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프만스탈과 슈트라우스의 공동 작업은 호프만스탈이 착상하여 소재를 언어로 형상화하고 또 무대 효과가 있는 상황을 묘사하면 슈트라우스가 음악 장면의 전문가로 극적인 구성이나 결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성격상 호프만스탈은 우울하고 회상적이며 명상적이어서 슈트라우스와는 전적으로 달랐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공통점도 가졌는데 두 사람 다 인문 교육을 받았고, 다독하여 훌륭한 교양을 갖춘데다 감각론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하여 오페라 "낙쏘스섬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 op. 60)", "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 op. 65)"과 "이집트의 헬레나 (Die aegyptische Helena op .75)"를 합작하여 발표할 수 있었다. 1929년 "아라벨라 (Arabella op.79)"의 작곡이 진행되는 동안 슈트라우스보다 열 살 어린 리브레티스트 호프만스탈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물 여섯 살된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에 충격을 받아 아들 장례식을 바로 앞두고 치명적인 뇌졸증 발작을 일으켰던 것이다. 모친 (1910)과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모든 오페라의 지휘를 맡아 주었던 에른스트 폰 슈흐 (1914)의 죽음에 이어 그는 또 하나의 불행을 감수해야 했다.

11.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이년 후 슈트라우스는 다시 오페라 작곡을 염두에 두고 "인젤 (Insel)"출판사의 출판업자 안톤 킵펜베르크 (Anton Kippenberg)에게 혹시 작가 쉬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가 그를 위해 오페라 각본을 쓸 의향이 있는지 넌즈시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킵펜베르크는 곧 이 일을 영예롭게 여기는 츠바이크와 슈트라우스를 직접 만날 수 있게 주선하였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츠바이크는 벤 존슨 (Ben Jonson)의 "말없는 여인 (The Silent Woman)"을 본으로 할 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 소재에 금방 매료되었다. 츠바이크가 존슨의 내용을 자유롭게 변형하여 쓴 오페라 각본이 작곡하기에 적합하여 슈트라우스는 아주 만족하였다. 그는 호프만스탈에 이어 앞으로 오페라 가사를 쓸 극작가를 찾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칼 뵘 (Karl Boehm)의 지휘와 요제프 길렌 (Josef Gielen)의 연출로 드레스덴에서 1935년 6월 24일 초연될 예정이던 이 오페라 (Die schweigsame Frau op. 80)는 가사를 쓴 츠바이크가 유대인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1933년부터 시작된 독일 제 3 제국의 유태인 탄압이 점점 그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선동과 음모 속에서 이미 정해진 초연을 어렵사리 치를 수는 있었지만 삼회의 공연으로 막을 내려야 했고 슈트라우스는 7월 14일자로 "전국 음악원장"과 독일작곡가 협회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 "장미기사"를 제외한 그의 모든 오페라가 일년간 상연 금지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슈트라우스가 고령으로 쇠약해진 건강 상태 때문에 사임할 것을 국무 대신 괴벨스 (Joseph Goebbels)에게 청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츠바이크에게 보낸 이른바 "민족적인 정견이 없는" 편지가 비밀 국가 경찰 수중에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예민하고 섬세한 유럽인인 츠바이크는 나중에 "평화의 날"과 "카프리치오"가 될 리브레토 구상도 했지만 "말없는 여인"이 초연되기 얼마 전 슈트라우스에게 앞으로 같이 작업하는 것에서 풀어 놓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나치스 정권의 권력 장악이 무엇을 뜻하는지 벌써 감지한 츠바이크는 자신으로 하여금 존경하는 작곡가 슈트라우스가 성가심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답장에 누가 어느 인종에 속하는지는 문제되지 않으며 다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며 츠바이크가 그를 위해 계속 다음 오페라의 리브레티스트가 되어줄 것을 간곡하게 고집하였다. ("말없는 여인"의 초연때 어려움 속에서도 슈트라우스는 쉬테판 츠바이크라는 이름이 리브레티스트로 명확히 프로그램에 인쇄되도록 했었다.) 이외 독일 민족 사회당원에게 거슬리는 여러 문장이 들어 있던 이 편지는 수신인 츠바이크에게 배달되지 않았다. 츠바이크는 1935년 영국을 거쳐 브라질 (Brasilien)로 이주한 뒤 리오 데 자네이로 (Rio de Janerio) 근처에서 그의 두번째 부인과 함께 1942년 자살하고 말았다.

히틀러 (Adolf Hitler) 치하의 제 3 제국은 오랫동안 독일 작곡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고 국제적인 평판과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슈트라우스를 1933년 11월 15일 새로 마련한 "전국 음악원 (Reichsmusikkammer)"의 원장으로 (사전에 슈트라우스에게 묻지도 않고) 임명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이미 열거한 대로 작곡가로서 점차 자신의 음악 세계를 다져 갔듯이 지휘자로도 차곡 차곡 경력을 쌓아서 1906년 잘츠부르크 (Salzburg)에서 처음으로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지휘하였고 1907년 파리에서 여섯번 "잘로메"를 연주한 뒤 레종 도뇌르 (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이어서 1908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31일간의 유럽 연주 여행을 하며 31군데의 도시에서 지휘하였다. 1908년부터는 베를린 궁정오페라단의 총지휘자가 되었을 뿐더러 10년간 궁정악단의 연주회 지휘도 맡게 되었다. 1919년 12월 그는 활동 무대를 빈으로 옮겨 프란츠 솰크 (Franz Schalk)와 함께 빈 국립오페라단의 지휘자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외부 연주도 활발하여 이듬해 (1920년 8월-11월) 동료인 솰크 그리고 빈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같이 처음으로 남미 연주 여행도 했다. 리브레티스트 호프만스탈, 연출가 라인하르트와 함께 1917년 "잘츠부르크 축제공동체 (Salzburger Festspielgemeinde)"를 창립한 뒤 1922년 처음으로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지휘했고 (모차르트의 "돈 죠반니"와 "코지 판 툿떼") 두번째 북미 연주도 떠났다. 슈트라우스는 또한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작곡 강의도 하여 활동 범위를 지휘와 작곡에만 제한하지 않았다. 사회 문제도 도외시 하지 않아 작곡가의 저작권 보호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곤궁한 음악가를 위한 구원활동도 폈다. 또한 리스트가 1861년 발족한 "독일 음악협회 (Allgemeiner Deuscher Musikverein)"의 회장 (1901-1909)으로 마알러를 비롯한 동시대 작곡가 (핏츠너 Hans Pfitzner, 레거 Max Reger, 지벨리우스 Jean Sibelius, 바르토크 Bela Bartok)의 작품이 연주되도록 하였고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같은 곤궁한 젊은 음악예술가들을 장학생으로 추천하였다.

슈트라우스는 1898년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해 지기 전 이미 교향시 작곡가로 그의 이름이 암스테르담 (Amsterdam) 음악당 벽에 금으로 바그너와 리스트 이름 옆에 새겨지는 영광을 안았다. 런던에서는 1903년 "암스테르담 콘써트게보 관현악단"에 의해 "슈트라우스 주간"이 개최되었다. "슈트라우스 주간"은 이어서 드레스덴 (1909), 쉬툿트가르트 (1912), 만하임 (Mannheim 1917)에서 열였고 1910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슈트라우스 오페라 연속 상연이 이루어졌다. 이해 뮌헨의 "슈트라우스 대 주간"때 슈트라우스는 막씨밀리안 훈장 (Ritter des Maximilianordens)을 받기도 하였다. 1914년 그의 50회 생일을 기념하여 고향 뮌헨에 "슈트라우스 거리"가 생겼고 생가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영국의 옥스포드대학은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에게는 190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로 부터 받은 학위에 이어 두번째 것이었다. 십년후 60회 생일을 맞아서는 드레스덴에 "슈트라우스 광장"이 들어섰고 슈트라우스는 빈의 명예시민이 되었으며 "빈 슈베르트 연합회 (Wiener Schubertbund)"의 명예회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벌써 1910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와 연주회 이외에 연 25회 오페라를 상연한다는 객원 지휘자로 계약을 바꿨을 정도로 외부 청탁을 많이 받던 지휘자였다. 베를린을 떠날 때처럼 빈에서도 연주 여행으로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문제가 되자 그는 1924년 11월 빈 국립오페라단과 작별했다. 그래서 이 후로는 일체의 계약이나 의무에 얽매임없이 작곡하였고 그의 형편과 소망대로 연주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 같은 슈트라우스의 위치와 능력을 감안할 때 독일 민족 사회당이 선전을 위해 그에게 감투를 씌우려 한 것은 당연했다. 천성적으로 정치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래서 별다른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슈트라우스는 초기 힛틀러 정권아래 "전국음악원장"이라는 직위를 "음악과 연극을 장려하려는 새 정부의 선한 의지"를 발판으로 좋은 일을 해 보고자 하는 "순진한" 마음에서 아무런 부담도, 의심도 없이 받아 들였다. 그는 곧 생각과는 동떨어진 현실을 인식하고 크게 실망하였다. 첫번째 음악원 회의 (1934년 2월 13일) 개회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촛점은 좁은 의미의 독일 정치가 아니라 독일의 문화, 음악 그리고 음악가에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독일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아래 궁정 악장으로 쓰임을 받았던 예술가 슈트라우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정체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곳에서 연주되어 얼마나 생생하게 후대에 보전될 수 있느냐에 있었다. 특히 신작한 오페라의 상연 여부는 그에게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쉬테판 츠바이크는 후에 슈트라우스의 이런 경향을 "예술 중심주의"라 정의하면서 슈트라우스도 언제든지 아무렇지 않게 이런 본심을 드러내어서 말하였다고 했다. 슈트라우스는 또 철저히 이런 그의 세계관에 따라 살았다. 그는 벌써 1912년 호프만스탈에게 "맨 처음에 예술이고 그 다음에 다른 동기가 따라온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쉬테판 츠바이크과 작업하는 것을 금지하고 슈트라우스에게 "전국음악원장" 직위를 반납하게 하였지만 힛틀러 정권은 바흐에서 베토벤, 브람스 그리고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독일 음악의 세계적 위신이 지속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는 다른 작곡가나 자신의 곡을 지휘하는 사람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전국음악원장"을 지냈을 뿐더러 나치스 정권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 모든 것이 또한 전쟁 후 그들에게 협력했다고 해석되어 짐이 되었다. 겉으로 나타난 그의 모습으로는 그런 오해를 불러 들일 만도 했으니 "아리안족 (arisch)"이 아닌 음악가들이 배척되는 것을 보고 지휘를 거부한 토스카니니 (Arturo Toscanini)를 대신하여 1933년 바이로이트 축제때 "파르지팔"을 지휘했고 (바그너 숭배자인 그는 이 음악회를 구제하기 위해 지휘료도 받지 않고 무대에 섰었다. 슈트라우스는 1894년 처음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이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추정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때까지 여기서 다시 지휘한 적이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해고된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의 필하모니 관현악단 음악회를 한번 떠맡았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피아 개막식에선 자신의 "올림픽 송가"를 지휘했다. 또한 1940년 토쿄에서는 그의 위촉작품인 "일본 제국의 2600년 존속 기념 경축 음악 (Japanische Festmusik fuer grosses Orchester zur Feier des 2600jaehrigen Bestehens des Kaiserreichs Japan op. 84)"이 처음 울리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쉬테판 츠바이크에게 보낸 문제의 편지에 바이로이트 (바그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토스카니니를 대신하였고 베를린의 관현악단을 위해 지휘한 것이지 어떤 정치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고 밝혔다. 츠바이크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는 "운동을 증오하며 경멸하는 사람이지만 심심해서 조야한 사람들을 위해 올림픽 송가를 작곡하고 있다"며 속을 터보이기도 한 슈트라우스는 사실 유태인 며느리를 둔 흠있은 약자로 어려운 상황에 박혀져 있었다. (게다가 그의 리브레티스트였던 호프만스탈도 이탈리아 피가 섞인 유태인으로 아리안 사람이 아니었고 슈트라우스의 출판자도 유태인이었다.) 일본 제국을 위한 경축 음악의 작곡은 금후 며느리가 유태인이라고 비방과 박해를 받게 되지 않을거다라는 구속적인 확언을 당시 대사로 있던 일본 왕자 코노예가 독일 정부로부터 얻어 준다는 조건하에 응했다.

당시 가르미쉬의 지구장인 하우스뵉 (Hausboeck)은 유태인인 슈트라우스의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며느리 알리스 (Alice)는 자택 구류령과 구매 금지령을 받았고 슈트라우스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는 두 손자는 학교로 가는 도중 동급생들에게 모욕을 받으며 구타당한 일도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이런 며느리와 두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당국에 여러번 굴종적인 청원을 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 26명은 결국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일도 있었는데 제 3 제국 범위를 떠난 여행 허가지가 스위스 뿐이었던 슈트라우스에게 1943년부터는 이 여행마저 금지되었다. 그는 취리히 (Zuerich) 근처 바덴 (Baden)에서 정기적으로 요양을 해 왔었다.

1940년 6월 28일 슈트라우스는 원래 "미다스와 다나에"라고 불린 오페라 "다나에의 사랑 (Die Liebe der Danae op. 83)"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작품이 전쟁 중에 공연되는 것을 원치 않아 봉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수 년에 걸친 외교적인 권유로 1941년부터 "잘츠부르크 축제"의 총감독을 맡고 있던 클레멘스 크라우스 (Clemens Krauss)는 슈트라우스의 마음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 오페라는 슈트라우스가 80세 되던 1944년 잘츠부르크 축제때 공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7월 20일 힛틀러의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총력전으로 들어 가며 모든 축제 공연이 금지되고 모든 극장이 문을 닫아야 했으므로 취소되고 말았다. 크라우스는 연로한 슈트라우스가 한번이라도 "다나에의 사랑"이 상연되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해 어려운 가운데도 총 무대 연습의 허가를 받아 냈다. 이리하여 슈트라우스는 8월 16일 초연을 대신하는 역사적이며 감격적인 총연습을 초대된 관객과 함께 시청할 수 있었다. 마지막 음이 사라졌을 때 잠시 깊은 침묵의 순간이 흘렀다. 감동한 지휘자 크라우스가 이 상연의 의미를 몇마디의 문장으로 요약하자 이윽고 슈트라우스는 관현악단 난간으로 와서 공연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두 손을 들어 감사하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것은 서양 문화의 종말입니다. 혹시 더 좋은 세상이 되면 다시 봅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쟁으로 붕괴된 조국의 모든 아름다웠던 것들에게 작별을 고한 셈이었다. (크라우스에게는 "이젠 죽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슈트라우스의 아버지가 49년간이나 근무하고 그 자신 60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게 하는 뮌헨의 오페라극장은 이미 1943년 10월 2/3일 파괴되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계속해서 그에게는 독일 문화의 종말을 의미하는 베를린, 빈, 드레스덴의 오페라극장 폭격 소식을 들어야 했다.

"다나에의 사랑"의 총연습이 시행되던 1944년 슈트라우스와 나치스 정권과의 사이는 극도로 첨예화되어 당원들이 슈트라우스와 교류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을 정도였다. 이해 초 슈트라우스가 전쟁과 힛틀러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 것이 힛틀러에게 밀고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80세 생일 기념 행사는 처음에 취소되었다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aengler)의 중재로 제한된 범위 안에서 허용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생일 축하 행사는 청중의 뜨거운 갈채 속에서 빈에서 열였다: 칼 뵘의 지휘로 "낙쏘스섬의 아리아드네"가 상연되었고 슈트라우스 자신은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기념음악회를 지휘하였다. 신문 잡지에는 그러나 상부의 지시에 의해 오로지 그의 작품만이 언급되었다. 관계 당국이 슈트라우스라는 인물이나 그의 삶에 대한 보도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막의 오펜바흐 (Jacques Offenbach)풍의 유쾌한 신화 "다나에의 사랑"의 가사를 쓴 작가는 쉬테란 츠바이크가 추천한 빈의 도서관원이며 연극 역사가인 요제프 그레고르 (Joseph Gregor)였다. 사실 1920년 호프만스탈은 "다나에 혹은 타산적인 결혼"이라는 제목하에 초안을 잡은 일이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잠시 이 소재에 몰두한 적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곧 잊어 버리고 말았다.) 16년 후 음악학자며 그의 전기 작가인 빌리 슈 (Willi Schuh)가 이를 상기시켰고 마침 그레고르도 다나에를 오페라의 인물로 천거하여 작곡에 착수하게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세번째 각본 작가인 그레고르와의 공동 작업은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나에의 사랑 "외에 "평화의 날 (Friedenstag op. 81)"과 목가적인 비극 "다프네 (Daphne op. 82)"를 창작하였다. "다나에의 사랑 "은 슈트라우스의 예감대로 그가 죽은 지 거의 3년이 지난 1952년 8월 14일 잘츠부르크 축제때 초연되었다.

12.  오페라 "카프리치오" 그리고 해피 엔드

슈트라우스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는 "카프리치오 (Capriccio op. 85)"다. 각본은 빈 시절 슈트라우스의 조수였으며 당시 뮌헨의 국립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있던 클레멘스 크라우스 (그는 벌써 빈의 소년합창단원때부터 오페라 경험을 쌓은 음악인이었다.)가 썼는데 "음악을 위한 대화극"으로 슈트라우스가 1941년 완성한 "예술 유언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오페라를 작곡하게 된 동기는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예술에 대한 의문을 직접 무대에 올려 토론에 붙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자극은 카스티 (Giambattista Casti)의 각본 "맨먼저 음악, 그 다음에 언어"로 부터 받았다. 이 "Prima la musica - poi le parole"는 안토니오 살리에르 (Antonio Salieri)가 곡을 썼으며 모차르트의 가극 "무대 감독"의 경쟁 오페라였다. 복잡한 생성사를 지닌 이 오페라의 제목 "카프리치오"는 리브레티스트인 크라우스가 붙였다. 슈트라우스는 의식적으로 사건의 진행이나, "말이냐 음악이냐"라는 토론에 있어 뚜렷한 맺음과 결정을 피함으로써 음악극의 독창성은 이성과 감정의 합성에서 기인하며, 말과 음악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을만큼 통일체를 이루었을때 생겨난다는 그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1945년 4월 가르미쉬의 별장에서 슈트라우스는 드디어 종전을 맞게 되었다. 미 점령군들이 별장 앞으로 들이닥치자 그는 지프차를 탄 한 미군 소령에게 다가가 "장미기사"와 "잘로메"를 작곡한 사람이라고 소개함으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서 악수 교환이 이루어졌고 슈트라우스의 별장은 극적으로 압류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곧 몇명의 음악인과 음악애호가인 미군들과 친교도 맺어 졌다. 슈트라우스는 늙은 몸에 전후 물자 부족으로 식량과 땔감도 충분치 않자 (가르미쉬의 미군 지휘관의 허락으로) 이들과 스위스의 친구들 도움으로 10월 병든 파울리네와 함께 바덴으로 거처를 옮겼다. 3년 반에 이르는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후에 스위스의 폰트레지나 (Pontresina)와 몽트뢰 (Montreux)에 머물며 작곡 생활을 지속했다. 슈트라우스는 많은 시간을 이 호텔 저 호텔에서 보내야 했던 이 시절 연합군으로부터 은행 구좌와 상연료가 봉쇄되어 재정적 곤궁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자필 악보를 저당 잡히거나 팔아 생활 상태를 개선해야 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제 1차 세계 전쟁으로 30년간 힘들여 저축한 런던의 전재산을 영국인들에게 압수 당하고 인프레로 몽땅 잃은 적이 있어 (50세부터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랬던 그는 이 일로 8일 동안 매우 의기 소침해 있었으나 막 시작한 "그림자 없는 여인"의 작곡을 계속했고 힘들게 돈버는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고 하였다.) 두번이나 재산을 잃은 셈이었다.

그는 교향시를 작곡하기 시작하며 중단했던 기악곡 작곡을 전후에 다시 연속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지휘봉에서 해방된 오른쪽 손목이 너무 일찍 마비되지 않도록 "손목 관절을 위한 운동"의 산물이었다. 1945년에 나온 작품으로 뮌헨의 오페라극장을 잃은 슬픔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변형. 23성부의 독주 현악주자를 위한 조곡 (Metamorphosen. Suite fuer 23 Solostreicher)", 피츠버그 교향악단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의 오보에 주자로, 가르미쉬 별장에 왔던 미군중에 한 사람이었던 죤 델란시 (John DeLancie)의 제기로 쓰게 된 "오보에 협주곡 (Konzert fuer Oboe und kleines Orchester)",그리고 "16개의 취주악기를 위한 두번째 소나티네 (II. Sonatine fuer 16 Blasinstrumente)"를 들 수 있는데 1946년에 앞의 두 곡은 취리히, 마지막 곡은 취리히 근방의 빈터투르 (Winterthur)에서 초연되었다. 1947년 "클라리넷, 파곳, 관현악과 하프를 위한 두엣 콘체르티노 (Duett-Concertino fuer Klarinette und Fagott mit Streich-Orchester und Harfe)"를 작곡한 뒤 슈트라우스는 기력을 모아 대담한 선율에 관현악 반주가 따르는 "마지막 4편의 가곡 (Vier letzte Lieder fuer Sopran und Orchester)"을 작곡하였다. 1946년 스케치하기 시작하여 1948년 4월 27일 완성한 첫번째 곡은 아이헨도르프 (Joseph Freiherr von Eichendorff)의 시 "낙조 (Im Abendrot)"다. 나머지 세곡은 헤르만 헷쎄 (Hermann Hesse)의 "봄 (Fruehlung)", "취침 (Beim Schlafengehen)" 그리고 1948년 9월 20일 완작한 "9월 (September)"이다. 슈트라우스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내 파울리네를 위해 작곡한 이 작품은 그도 그녀도 듣지 못했다.

1947년 10월 팔순이 넘은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마지막으로 4 주간의 해외 연주 여행을 떠났다. 출판업자 에른스트 로트 (Ernst Roth)와 "잘로메"를 런던 초연으로 지휘한 후 열렬하게 슈트라우스를 애호하게 된 지휘자 토마스 비참 경 (Sir Thomas Beecham)이 제의하여 BBC 방송국과 함께 런던에서 슈트라우스 축제가 열려던 것이다. 이 행사중 비참 경은 "엘렉트라"를 음악회 형식으로 지휘하였고 슈트라우스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익살극", "가정 교향곡", "돈 쥬앙", "장미기사"의 "첫번째 월츠 조곡"과 "틸 오일렌쉬피겔"을 "알버트 홀"에서 지휘하였다. 정치적인 비난을 받고 있던 슈트라우스는 영국의 음악인과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이국 땅에서 음악가로서의 위신을 되찾았다. 다음해 나치에 동조한 혐의에서 공식적으로 풀려난 뒤 1949년 5월 슈트라우스는 85회의 생일 (6월 11일)을 앞두고 부인과 함께 가르미쉬 별장으로 되돌아왔다. 오랫만에 다시 그를 위한 대대적인 생일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슈트라우스 재단이 설립되고 뮌헨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가르미쉬구에서는 그를 명예시민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희망에 따라 이틀 후 뮌헨의 게르트너 플랏츠 극장 (Theater am Gaertnerplatz)에서는 그의 "평민 귀족"이 기념 연주되었다.

독일로 오기 전 그는 늙은 몸에 두번이나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1946년 4월 맹장 수술에 이어 1948년 12월 그는 스위스 로잔느 Lausanne에서 어려운 방광수술을 받았다.) 85세 생일 축하 행사를 치른 후 7월 자신에 대한 영화 촬영을 위해 슈트라우스는 생전에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잡아 섭정궁 극장 (Prinzregententheater)에서는 "장미기사"의 이막 끝부분을, 뮌헨 방송국에서는 오페라 "카프리치오"의 "달빛 간주곡"을 지휘하였다. 8월에 병상에 누운 그는 다시 자리를 털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도 29일 연출가 루돌프 오토 하르트만 (Rudolf Otto Hartmann)과 독일 극장의 재건설 등 극장에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 논하고 "다나에의 사랑"의 초연 날짜를 확정했다. 끝까지 며느리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던 그는 가르미쉬 별장에서 9월 8일 오후 두시 조금 지나서 심장 발작과 요독증으로 타계하였다. 삼일 후 뮌헨의 동쪽 묘지에서 전 세계의 많은 친구들이 미처 참석하지 못한 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몇년 전 며느리로부터 약속 받은 대로 이때 "장미기사" 삼막에 나오는 (여성)삼중창이 그의 관 옆에서 불려졌다. 그의 유골은 다시 가르미쉬 별장으로 돌아가 임종의 방에 보관 진열되었다. 18일 크라우스는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기념음악회를 열었고 그레고르는 여기서 영원한 고별사를 보냈다. 요제프 카일베르트 (Joseph Keilberth )는 10월 9일 바이로이트의 슈트라우스 음악회에서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을 지휘하여 그를 추모하였다. 10월 4일에는 에리히 엥겔 (Erich Engel)에 의해 "그림자 없는 여인"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Buenos Aires)의 테아트로 콜론 (Teatro Colon)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초연을 맞았다.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뜬지 여덟개월 후인 1950년 5월 13일 부인 파울리네도 그를 따랐다. 이것은 푸르트벵글러가 파울리네를 위한 "마지막 4편의 가곡"을 소프라노 키르스텐 플락스타트 (Kirsten Flagstad)와 런던에서 처음으로 연주하기 9일 전이었다.

13.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음악가 슈트라우스와 50여년 해로한 부인 파울리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쉬트라우스가 그의 전기 작가에게 아내에 대한 언급을 절대 피해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부모와 친구 그리고 하나 뿐인 여동생과 어떤 사이를 이루고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반면 쉬트라우스 자신은 희극 "간주곡 (Intermezzo)"을 작사 작곡함으로 자신의 결혼 생활 일부를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를 통해 파울리네가 작곡가의 주변 환경을 그리 유쾌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세상 호기심에 노출되어 있음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실제로 슈트라우스 부부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파울리네의 격하기 쉬운 성격 덕분으로 극화될 수 있었다 하겠다. 그들은 1887년 펠다핑 (Feldafing 뮌헨 쉬타른베르거 호수 근처의 지명) 슈트라우스 외삼촌의 여름 별장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건너 편엔 파울리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파울리네 데 아나 (de Ahna)는 1863년 인골슈타트 (Ingolstadt)에서 스웨덴의 귀족 출신인 아버지 아돌프 데 아나 (Adolf de Ahna)와 독일 어머니 마리아 (Maria, 친정 성 후버 Huber)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인으로 주목할 만한 출세를 한 데 아나 장군은 1871년 베르사이유의 독일 황제대관식때 이미 젊은 장교로 바이에른 대표단 일원에 속하였다. 파울리네는 어릴 적 아버지가 육군 소장으로 1874년 뮌헨에 오기 전까지 그의 근무지를 따라 학교를 자주 옮겨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고운 음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음악 애호가인 데 아나 장군이 이런 딸에게 성악 공부를 하게 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슈트라우스 전기를 쓴 막스 슈타이닛쩌 (Max Steinitzer)는 그녀의 개인 교습 교사였다. 슈타이닛쩌는 데 아나 장군이 젊은 작곡가 슈트라우스와 교제하기를 전적으로 환영하리라는 것을 알아 채고는 만남을 주선하였다. 당시 뮌헨 궁정오페라의 제 3 지휘자였던 슈트라우스와 데 아나 장군은 바그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바로 열띤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슈타이니쩌는 고집이 세고 특유한 성미로 그에게 힘에 벅찼던 학생 파울리네를 회의를 품으면서도 슈트라우스에게 가르쳐 보도록 하였다. 단 한번의 교습을 끝내고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녀는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재능이 있어. 단지 그걸 끄집어 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실제로 그 끄집어 내는 일을 조직적으로 시도하였다. 매일 피아노 반주자와 연습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너의 여조카인 율리에 리터(Julie Ritter)에게 연기 지도를 받도록 하였다. 그들은 집중적으로 여러 역 ("마탄의 사수"의 아가테,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 구노의 그렛현)을 연습하였다.

전기에서 보았듯이 1889년 슈트라우스가 바이마르로 갈때 파울리네도 그를 따라가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890년 부터 사년 간 바이마르 오페라에 정식으로 채용되어 "마적 "의 파미나, "리엔찌 "의 강화 사절, 피델리오 (Fidelio), 이졸데 (Isolde) 등의 역을 맡았다. 슈트라우스가 훔퍼딩크 (Humperdinck)의 동화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Haensel und Gretel)"의 초연을 지휘할 때 파울리네는 헨젤 역을 맡아 오늘까지 자주 연주되는 이 오페라의 첫번째 헨젤이 되었다. 또한 슈트라우스 최초의 오페라 "군트람" 에서는 여자 주인공인 프라이힐트를 맡아 활약했다. 마지막 총연습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는 파울리네의 독특한 기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러니까 남자 주인공이 노래할 때 지휘자 슈트라우스가 자주 중지 신호를 보내어 교정을 하도록 했는데 그녀 차례 때 중지 신호가 없자 "불안하기도 하고 샘도 난" 파울리네는 노래 부르기를 멈추고는 왜 자신에게 중지 신호를 보내지 않느냐고 따졌다. 슈트라우스가 당신이 당신 역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라 말하자 파울리네는 "나는 중지 신호를 받고 싶단 말이에요." 하며 악보를 슈트라우스에게 던져 버렸다. (이 던지기는 실패로 돌아가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굿하일 (Gutheil)이라는 제 2 바이올린주자에게 날아가고 말았다.) 이들은 "군트람"의 초연 이틀 전 약혼하였다. 소프라노로서 파울리네의 능력을 높히 평가한 슈트라우스는 또한 전체적으로 실패로 돌아 간 작품이었지만 이막 끝 그녀가 바이마르에서나 뮌헨 상연시 관중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혼 신청을 받고 행복감에 싸이기도 했지만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파울리네가 직업 생활이냐 아니면 음악가의 아내로 그리고 주부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것이냐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녀는 함부르크 (Hamburg)에서 온 가수 초빙을 거절하였다.

결혼 후 파울리네는 뮌헨 오페라 객원가수로 무대 활동을 잠시 계속했지만 단하나의 자식인 아들이 태어난 후 은퇴하고 리더아벤트만 가졌다. 그녀는 남편의 많은 가곡을 관중에 소개하였는데 슈트라우스는 그녀의 가곡 연주도 풍부한 표현력을 지니며 시적이라고 높히 평가하였다. 실제로 미국 순회 연주때 한 비평가는 슈트라우스 부인이 남편의 가곡을 얼마나 생동적으로 부르는지 (정작 반주하는 작곡가는 지루한 듯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마치 자신이 직접 작곡한 듯했다고 칭찬하였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슈트라우스의 대 교향시나 오페라 작곡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곡 작곡에는 특별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같다. 성악가 롯테 레만 (Lotte Lehmann)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가 슈트라우스의 별장에서 그의 반주에 맞춰 그의 가곡을 부를 때면 파울리네가 자주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껴안았다고 하였다. 그 두 사람 외에 아무도 모르는 성스럽고 감동적인 순간을 상기한 것 아닐까.

슈트라우스의 아내 파울리네에 대한 여러 가지 믿기 어려운 일화는 음악가나 주변 인물을 통해 알려졌다. 예로 들면 가르미쉬 별장에서 식사할 때 거의 언제나 혼자만 말했다거나 이차 대전 중 빈에서 현악 사중주 친구들이 슈트라우스 집에와 즐거워 식사 시간도 잊고 연주를 하니 그들을 초대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파울리네는 문지방에 우뚝 서서 그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한 연주자를 붙들고 옆눈질을 아내 쪽으로 하며 말했다 한다; "오늘 오후에 다시 올 수 있어? 나는 다시 작곡을 해야 하거든!") 구스타프 마알러는 부인 알마 (Alma)에게 보고하길 그가 1907년 베를린에서 슈트라우스를 방문했을 때 파울리네가 쉿쉿하며 문을 열더니 부인 거실에 안내하고는 온갖 잡담을 퍼붓고는 대답을 기다리지고 않고 온갖 것을 묻더니 리햐르트가 라이프찌히에서 힘든 연습을 하고는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니벨룽엔 반지"의 "신들의 황혼"을 지휘하여 몹씨 피곤하여 오후 잠을 자고 있어 주의 깊게 지키고 있노라 하여 감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불량배 (슈트라우스) 깨울 시간이 되었다며 마알러를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큰 목소리로 "일어나시오 구스타프가 왔소!"하고 소리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파울리네는 그를 한 시간 동안 구스타프라고 하더니 그후 갑자기 다시 악장님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 1902년 "꺼진 불"이 마알러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 파울리네는 극장 특별석에 앉아 누구 맘에도 들지 않을 작품이며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들어 있지 않고 바그너등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훔쳐 만들었다며 줄곳 소동을 부렸다고 한다. 상연이 끝나자 슈트라우스는 무대에 올라가 여러번 인사를 한 다음 상기된 채 파울리네가 앉은 곳으로 와 자기의 성공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가고 물으니 이 도둑이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하며 들고양이처럼 덤벼 들었다 한다. 나중에 슈트라우스는 마알러에게 사과하기를 "내 아내는 자주 지독히도 우악스럽지만 나는 바로 그런 것이 필요하답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사과했을 것이다.)

단순하고 본원적이어서 아무 생각없이 마구 말하는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의 부모와 처음 화합을 잘 할 수 없었다 한다. 아마도 아들의 탄생과 더불어 사이가 개선되지 않았을까. 슈트라우스는 부모에게 파울리네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연모하며 철저한 숙고 끝에 자기 아내로 선발하였다고 전했다. 슈트라우스 (슈토르히 궁정악장의 역)가 "간주곡"의 스캇놀이 장면에서 아내의 특성을 옹호하며, 멍하니 지내기 좋아하고 빈들빈들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잘하는 자기가 이 만한 위치에 다다른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라고 하며 특히 건강 관리를 빈틈없이 잘해 주었다고 했듯이 슈트라우스가 오랫 동안 그렇게 활발한 작곡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슈트라우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파울리네의 업적이라고 했다. 알맞는 식생활부터 시작하여 정기적으로 산보하기 그리고 슈트라우스가 스캇놀이 할 때면 담배연기가 꽉찬 방을 규칙적으로 환기시키도록 지시 감독하였고 어떤 때는 또한 큰 소리로 작곡하기를 독촉하였다 한다. 행복한 가정 생활도 누린 예외적인 음악가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유일하고 소중한 이 여인을 애칭하여 파욱썰 (Pauxerl)이라고 불렀는데 연주 여행 중엔 매일 편지를 썼으며 결혼한지 36년이 지난 1930년에도 "나는 오로지 당신 곁에서만 완전히 행복하다오"라는 고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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